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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의 방향(2006/10/10) 일치와 연합을 위한 목회자모임 포럼

들어가는 말 : 일치와 연합을 위한 행보

세계화 시대는 이 세계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임을 선언한다. 세계화 시대는 지방화 시대인데 이는 세계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인 것을 의미한다. 지구촌의 인류는 이제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인 세계를 인정해야 하는 복합적 행보를 하고 있다. 하나인 세계와 여럿인 세계는 다양성(diversity)과 통일성(unity)이 동시에 강조되며 양립하는 세계이다. 개체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동시에 공동체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 질서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결론에 의하면 제4의 물결이 제3의 물결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고 한다. 산업사회인 제2의 물결시대는 분리와 경쟁을 그 기조로 하였으며 제3의 물결시대는 균형과 협력시대인데 비하여 제4의 물결시대는 통합과 공동창조의 시대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제3의 물결 이후의 증후군은 개교회주의를 퇴조시키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게 할 것이다. 제2의 물결의 기조인 분리와 경쟁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교회분열을 맛보았으며 교단을 양산하였다. 제3의 물결의 증후군은 자연히 교단주의가 퇴조하고 교회연합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제3의 물결 사조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발달하고 연합을 기조로 하는 교회운동을 활성화하게 될 것이다.

일회성(disposability)의 발달은 교회에 대한 소유개념이 임대개념 혹은 일회성 개념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내 교회'라는 개념이 강하였지만 미래 사회는 '우리 교회'라는 개념이 강하게 발달할 것이다. 동시에 미래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이동성(mobility)의 발달은 개교회주의 퇴조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대도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지역교회 개념을 이미 상실했다. 이러한 이동성은 개교회주의를 퇴조시키고 어떤 교회이든 편의에 따라 출석하게 만들 것이다. 일회성과 이동성의 발달 그리고 제4의 물결이라는 역사변천 과정은 교회로 하여금 자연히 개교회주의를 퇴조시키고 교회연합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생존방식이며, 교회의 존재 가치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본격화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로서의 통일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개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교회 운동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화와 지방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며 이끌어가야 하는 한국교회도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혁되어 교회 연합과 일치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연합운동을 매체로 한 소위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또다른 분열을 자초하였으며 이러한 분열의 경험은 최근까지 지속된 것을 보았다. 실제로 이러한 분열은 신학적 갈등과 교단 중심의 교회이기주의를 양산하였고 교회 당파성과 교회 폐쇄성을 극대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국교회의 경험으로 보면 교회 연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는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보혁(保革) 갈등, 교파와 개교회 중심의 교회 이기주의 그리고 기득권을 담보로 한 당파성과 폐쇄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우주적 보편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원리와 시대가 일치와 연합을 원하고 있다는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의 한국 교회의 새로운 동향의 하나는 교회연합에 대한 발전적 관심의 증가이다. 지난 2004년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회연합 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기구적 일치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 일을 위하여 '교단장협의회'가 적극적 중재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연합의 정통성과 실제적 능력을 가진 두 기관이 하나가 되고 회원 교단이나 기관이 모두 하나의 우산 아래서 명실공히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것은 전향적 한국교회의 발전이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9인 실무위원회'가 활발하게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였고 진행 중이다. 이러한 연합의 추세는 분열에 대한 자성과 반발심리도 작용했겠지만 교회연합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외면할 수 없는 당위성의 결과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교회연합체의 가시화의 행보는 서두르지 않아야 하지만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라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 믿음을 확실하고 떳떳하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몸말 : 일치와 연합의 방향

1. 세계화 시대에 세계화로

세계화란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한 미래어이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 가는 과정과 현상을 의미한다. 이른바 미래현상으로 불리는 3T 즉 교통, 장거리 통신, 관광은 전 세계 인류의 생활양식과 문화이해를 공유하게 하는 세계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란 용어는 최근에 와서 일반화되었지만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서 세계화를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 대 명령도 복음의 세계화에 대한 강한 명령으로 나타난다.

구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된 세계의 지방화 혹은 지역화 작업도 급속도로 확신되고 있다. 세계는 인종, 문화, 언어, 종교 등의 요인으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특징적 요인이 지방화를 촉발하는 계기인 것이다. 현재 191개국인 유엔의 가입국이 얼마 후에는 300내지 1000개국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화의 세계와 지방화의 세계는 같은 세계이다. 세계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닌 모순과 패러독스 속에서 발전적인 원심운동과 구심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도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미시구조에 관한 소립자 물리학이 전체로서의 우주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우주학에 합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사한 정치적 경제적 현상을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글로벌 패러독스(Global Paradox)라고 부른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기업은 기업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게 하며 새로운 부족주의(tribalism)를 탄생시켜 동질성의 체제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와 지방화는 세계의 이중구조가 아니라 하나이며 세계화와 신토불이도 이중구조나 갈등관계가 아니라 하나이다.

이런 세계화의 신개념은 자신의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파나 교단의 벽을 넘어서 모든 교회가 하나로 나아가는 새로운 개념의 시대이다. 실제로 평신도들은 이미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파와 교단의 개별성을 버리지 않아야 하나가 되는 길로 순탄하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찾는 것이 시대적 소리이다.

2. 포스트모던 사회에 통합적 사고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 의하면 제1의 물결은 농경시대로서 그다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제2의 물결은 산업사회로서 그 기조는 분열과 경쟁이었다. 이 시대에 나라는 나라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분리하여 많은 갈등을 초래하였고 모든 분야가 경쟁적 관계에 있었다. 세계는 크게 양대 강대국의 대결구도로 양분되어 있었고 이 냉전 체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21세기를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정보 사회라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1989년에 이미 21세기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89년은 동구권이 붕괴되던 해인데 동구권의 붕괴란 정보 사회의 구도로 세계가 재편되었다는 의미이다. 정보 사회의 기조는 산업 사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정보가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차이를 개미 사회와 거미 사회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미란 부지런히 일하여 모든 먹이를 독점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업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소유를 독점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거미는 개미가 아니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생물로 부지런히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좋은 길목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잡아먹는다. 정보 사회는 부지런함 보다 정보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정보 사회는 개미 사회와 같이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정보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져야 하며 모든 지식과 소유의 공유로 전환해야 한다. 발전적 정보사회는 일치와 공동창조로 나아간다. 이러한 기조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3. 교회의 성경적 요청으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시대적 다중적 요청과 압력이 그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보다 우선적인 것은 일치와 연합에 대한 성경적 요청이다. 성경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장면을 들려준다. 인간적으로 에서는 야곱을 용서할 수 없고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용서하고 만난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22)고 하셨다.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고 하여 일치와 연합의 방법을 제시한다. 바울이 제시한 일치와 연합의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통일성을 이룰 수 있고 일치와 연합 그리고 근자에 말하는 공동창조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둘을 안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엡2:14~16) 분이라고 하였다. 성경은 하나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연합의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배경으로 하나님 안에서 연합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이나 교회정치적 이념에 의존하여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통일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4. 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교회가 쇠퇴할 때에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두드러진다. 예배보다 회의가 많아진다. 예배나 기도회 등에는 참석하지 않지만 회의에는 빠지지 않는다. 교회보다 기관이 발달한다. 교회는 힘이 없어지지만 교회를 배경으로 한 기관은 발달한다. 그리고 상징과 의미의 극대화 현상이 나타나고 균형의 상실이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상징은 강조되고 의미는 죽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미는 강조되고 상징을 무시한다. 예배보다 회의가, 교회보다 기관이 발달하면 교회는 분열되고 일치하지 못한다. 교회연합을 위한 기관도 개교회보다 발달하면 교회연합은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예배는 구원의 목적이므로 교회는 예배에서 시작되며 예배 그 자체에 대한 강조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핵심 목적은 제사 즉 예배이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애굽에서 나온 후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게 하겠다고 하셨다. 애굽에서는 하나님께 제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속하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교회의 존재가치, 성도의 구원의 목적,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회복할 수 있다.

예배는 교파와 교단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예배의 근본에 벗어나지 않는 예배형식의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일치와 연합의 기본자세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성과 지성이 있는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는 말씀은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in truth) 드리는 예배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만나는 예배이다. 그리고 참 예배는 진리의 예배 즉 말씀의 예배이며 지성의 예배이다. 말씀이 살아있고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예배가 진리의 예배이다. 이 예배 가운데 모든 그리스도는 만날 수 있고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예배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게 한다. 캐나다의 종교사회학자인 레지널드 비비(Bibby)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한 경향은 교회를 떠나지는 않지만 교회를 출석하지는 않는 것이다. 현대의 영성적 양극화 현상의 결과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양산된다는 것이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또한 사이버 시대를 맞이하여 공동 예배를 거부하고 매체를 통한 예배로 만족하는 신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결과적 무교회주의자들이 증가하는데 대한 공동체성의 회복이 교회의 과제이다. 광야에서의 제사와 성막은 공동체성의 경험이었다. 지금도 예배와 교회는 공동체성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한 장소에서 함께 경험하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공동체적 경험이다.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이다.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모이기를 힘쓰는 예배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예배자들이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는 것은 일치와 연합의 중요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교회정치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

성경은 교회정치의 형태를 세 가지로 암시한다. 어느 하나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형태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첫째는 감독제(Episcopal)이다. 감독제는 한 사람에 의하여 교회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회중제(Congregational)이다. 회중제는 모든 사람에 의하여 교회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장로제(Presbyterian)이다. 장로제는 교인의 대표자에 의하여 교회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교회정치의 형태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다.

교회정치의 세 가지 형태는 각각 다른 교파와 교단을 만들었다. 교회정치의 차이는 예전의 차이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교회정치의 차이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일치와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모든 정치 제도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장점들을 인정하면서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수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모든 교파들이 장로제적 요소들을 크고 작게 가지고 있다. 대의정치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있고, 합리적 정치제도라고 하지만 반드시 장로제의 요소들을 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각 정치제도의 특징과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교회정치를 통한 효율적 목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각자 교회정치의 바른 수행과 다른 교회정치의 이해는 일치와 연합을 위한 행보를 빠르게 할 것이다.

6. 사회봉사의 공통점을 찾음으로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지향하는데 상향(upreach)과 내향(inreach)과 외향(outreach)이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이것은 예배와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세 가지 지향이 정 삼각형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는 상향을 강조하여 교회의 본질에는 충실하였으나 외향에는 상대적 소홀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와는 별개의 기관이 되었고 교회가 상향을 강조하는 동안 사회를 외면하였고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하였으나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마치 한국교회는 산 아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병든 소년을 외면한 채 산 꼭대기의 황홀경에 빠져 초막 셋을 짓고 산 교회였다. 한국교회의 초막 셋은 본당, 교육관, 기도원이었다. 마지막에라도 기도원이 아니라 사회복지관이 세워졌더라면 그 초막은 세 가지 지향을 충족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는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제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는 사도가 되어야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장의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그리고 베이비 거부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베이비붐 이전에는 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 붐 세대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세대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제 사회를 바라보는 교회로 변화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성장 신드롬'을 극복하면 성장할 수 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회인을 교회인 만들기'는 사회를 섬길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상향과 내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은 외향의 변을 길게 늘이는 작업이 한국교회에 절실하다.

교회의 사회적 사명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더구나 사회봉사에 대한 필요성이 확대되는 시대에 교회는 사회봉사에 참여하며 공동창조하므로 일치와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이미지 개선에도 상당한 부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 확실하다.

7. 신학의 보편성을 개발함으로

12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적 목회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세계적 신학자는 상대적으로 배출하지 못하였다. 세계적 신학자가 없는 교회에서 세계적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교회이지만 신학과 목회의 내용에 있어서는 세계적이라고 하기는 부끄러움이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신학은 세계적 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교리적이고 교파지향적인 종래의 신학교육이 초교파적이고 에큐메니칼 지향적인 미래의 신학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성서적-역사적' 지향성의 종래의 신학교육은 '성서적-상황적' 지향성의 미래의 신학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성서적-본문 비평적' 분석의 종래의 신학교육은 '사회-인류학적' 분석의 미래의 신학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세계화란 세계의 것을 수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적 교회이듯이 한국 신학을 세계적 신학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 한국 신학의 과제일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로 기록된 성서는 헬라적 사유를 가진 서구인들 보다 히브리적 사유를 가진 동양인들에게 더 익숙하며 더 유능한 신학자를 배출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기에 한국 신학의 세계화의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소외경험과 해방경험은 한국 신학의 개별성을 세계화할 수 있는 신학적 경험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역사적 경험과 한국교회의 성장의 경험과 한국적 문화의 이해 등은 한국 신학의 세계화에 소중한 자료들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문화적 연구에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유리한 조건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세기의 신학적 해석의 차이를 덮어두고 한국적 신학을 함께 개발한다면 한국적 신학이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문화인류학적 해석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신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일치와 연합을 모색할 수 있다.

8. 남북통일을 지향함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조국의 통일을 꿈꾸게 하고 꿈이 현실이 되게 일하게 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미래 예측을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가 21세기에 세계 중심 국가가 될 가능성은 높으며 그 가능성은 통일된 한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환태평양 시대로 중심이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의 한 자리에 우리나라가 위치하고 있다. 인천 공항을 동북아시아의 허브 공항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21세기에 중심이 될 우리나라는 남한이나 북한이라는 반쪽이 아니라 통일 한국이다. 우리나라의 통일은 21세기에 세계 중심국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며 필수적인 준비이다.

이런 시대적 현실을 목도하면서 한국 교회는 통일운동에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통일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과제나 사회적 과제가 아니라 선교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통일과 국가의 안보 없이는 진정한 샬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통일의 과제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는 통일운동에 가장 앞장 선 전위 부대이다. 통계적으로는 북한 사역과 탈북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기관, 특히 비영리단체(NGO) 가운데는 개신교에 뿌리를 둔 기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가장 강력한 NGO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정부(government)보다 거브넌스(governance)가 각광을 받고 있는 시대라는 점도 교회의 역할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현상적 결과로 볼 때도 개신교가 통일운동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운동에 앞장섰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당위적인 소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은 어느 때에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통일은 불시에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때를 위하여 교회가 준비하여 통일을 앞당기고 통일 이후의 혼란을 극소화해야 할 것이다. 불시에 다가올 통일을 위하여 교회는 통일을 위한 갖가지 시나리오를 통하여 통일 준비를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통일은 국제적 정치 역학에 의존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선교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통일 운동은 접근 양식이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이어야 하고, 선교적이어야 한다. 인문 과학적 접근은 약간의 도움은 되지만 교회의 통일 운동의 결정적 요인은 제공하지 못한다.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자세로 한국 교회가 남북 평화통일의 전위(前衛)가 되기 위하여 해야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화해의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둘째,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통일 과제는 가난해지는 연습이다. 셋째, 또 다른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일관된 대북 정책이다. 넷째, 교회는 통일에 앞서서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증가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에 대하여 교회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여섯째, 교회는 통일 이후 시대를 대비하여 북한의 교회를 재건하는 재원과 구체적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일곱째, 북한의 기근과 질환에 대하여 교회는 적절한 구호에 앞장서야 한다. 여덟째, 통일 후를 겨냥한 교회의 연합된 정책이 필요하다. 아홉째, 교회는 통일 이후에 발생할 갖가지 예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공동 대처할 수 있는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열째, 북한의 2,200만 인구를 우리의 미래 목회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통일의 시나리오와 대책을 연구하여 언제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맞이하든지 한국 교회는 사회적 혼란의 완충 역할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통일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기관은 교회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이 일을 통하여 일치와 연합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9. 영성의 갱신을 통하여

포스트모던 시대 교회가 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정보가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이해해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는 사회를 구원하는 도구는 아니다. 사회를 구원하는 것은 영성이다. 그러므로 21세기는 정보 사회인 동시에 영성 시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21세기를 영성 시대라고 정의한다. 영성이 중요한 사회 구성 요인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21세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는 영성이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고 사회가 이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같은 맥락이다.

영성이란 말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영성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독점하는 용어가 아니라 다른 종교와 학문의 분야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영이란 원래 하나님의 숨을 의미하듯이 영성이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한다.

기독교의 기능을 두 가지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성적 기능을 가진 영성적 종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가진 예언자적 종교라고 한다. 교회 역사학자들은 유럽 교회가 급속도로 쇠퇴의 원인은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교회의 무게 중심의 이동은 교회로 하여금 쇠퇴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이러한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에 건전한 영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불교의 영성이 있으며, 동서양의 신비종교가 영성이 있으며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영성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기독교적 영성과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영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에 제공하여야 한다.

이런 영성적 교회가 사회를 향해 힘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 건강한 영성을 제공하는 교회를 기대한다. 특히 양극화 시대에는 경제나 정보뿐만 아니라 영성도 양극화 현상이 뚜렷할 것이다. 양극화의 특징은 없는 쪽에서 있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특징은 자연스런 수평이동이 진행될 것이다. 결국 영성적 교회만 성장하고 생존할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서 이런 영성적 교회만이 사회적 기구로서 교회의 원 목적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영성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영성적 교회만이 미래사회에 생존할 것이며, 교회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영성을 회복하게 될 때에 사회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시대에 한국교회는 영성적이 되어야 하며, 모든 교회는 영성적으로 일치하고 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은 교회가 하나되게 하는 가장 힘있는 요인이다.

이성희 목사  churchr@church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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