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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님의 선교와 삶(2016/07/19)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역동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성서로 돌아가서 초대교회처럼 다시금 역동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우리의 선배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특징은 역동성이다. 한국 기독교가 유교와 다른 점은 바로 역동성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그와 같은 역동성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이기풍 목사의 선교와 삶을 통해서 이런 초기 한국기독교의 역동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2. 이기풍의 성장과 입신

이기풍은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평양사람이었다. 먼저 그는 평양의 유명한 깡패였고, 마펫에 의하면 하급 경찰관리였다. 그는 돌팔매를 잘했고, 수영도 잘했다. 당시 평양깡패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했다. 또한 그는 한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당시 평양에는 평양감사 민병석을 중심으로 강력한 유교복고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이기풍에게 서양인의 등장과 기독교선교는 매우 도전적인 것이었다. 유교적인 정신이 가득한 이기풍은 마펫의 선교를 방해했고, 유명한 이야기대로 돌팔매로 마펫의 턱에 상처를 남겼다. 이기풍은 단지 깡패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에 대항하는 의협심이 많은 전통적인 열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은 당시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아직도 중화중심 사상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결국 새로운 개화사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은 이기풍에게서도 나타났다. 이기풍은 원산에서 스왈렌선교사의 전도를 받았고,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평양에 돌아와서 마펫에게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은 이기풍만이 아니다. 청일전쟁 이후 평양은 기독교선교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 뒤 이기풍은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고, 마펫선교사와 함께 함경도 전도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3년부터 이기풍은 평양신학교에 최연소생으로 입학하여 서경조, 길선주, 방기창, 한석진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리고 1907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07년은 한국장로교회에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이요, 다른 하나는 장로교의 독로회의 조직이다. 대부흥운동은 영적인 힘이요, 독로회는 외적인 조직적인 힘이다. 나라는 망해 가는데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영적이며, 조직적인 정비를 허락하셨다. 그 결과 일제의 모진 박해를 이길 수 있었다.

이렇게 정비된 한국교회는 그 힘을 선교에 쏟았고,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제주도였다. 하나님이 첫 번째 일꾼을 세우신 기념으로 제주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제주도 선교를 망설였지만 이기풍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한 데에는 그의 부인 윤함예의 결심이 큰 몫을 감당하였다. 윤함예는 원래 양반집 자녀였는데, 중병에 걸려 예수를 믿고 낫게 되었다. 그 후 집안의 박해가 크자 그는 도망쳐 나와서 이길함 선교사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양녀로 살면서 숭의여학교 제 1회 졸업생이 되었다. 결국 선교사의 중매로 윤함례는 이기풍과 결혼하게 되었다. 윤함예는 당당하게 자신이 지어야 할 십자가를 언급했다.

3. 제주선교와 이기풍 목사

제주도 선교가 시작된 것인 신축교란의 광풍이 지나간 20세기 초였다. 당시 제주도 출신으로서 육지로 나가있던 사람들 가운데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돌아와서 기독교신앙을 유지했다. 특히 제주출신 조봉호는 애비슨의 세브란스에서 치료를 받고, 신자가 되어 다시 제주도에 돌아왔으며, 또 다른 제주출신 조봉호는 서울에서 경신학교와 평양에서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와 접했다(박정환 195). 장로교 독로회는 이들을 근거로 해서 제주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은 이기풍 목사였다. 그는 1907년 최초의 평양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이들은 다같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여기에는 길선주 목사도 포함되었다. 이기풍은 1908년초 제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천주교가 외세의 힘을 빌어서 선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이기풍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기풍은 힘을 가진 자로서가 아니라 힘 없는 자로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천주교의 선교가 서양의 힘을 배경으로 한 선교였다면 이기풍의 선교는 고난의 길로서의 선교였다. 신축교란으로 외세에 대해서 배척하던 제주도에 선교는 쉽지 않았고, 이기풍은 사람을 만나서 전도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난에 지쳐서 쓰러져 있는데, 이것을 해녀들이 보고 구원해 주었고, 그 해녀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첫 번째 전도였다고 한다.

이기풍은 사랑의 헌신으로서 선교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큰 홍수가 났고, 여기에 한 여인이 휩쓸리게 되었다. 이기풍은 대동강을 건너던 수영실력을 발휘해서 이 여인을 살려냈고, 이것은 제주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기풍은 병든 자를 고치는 신유의 사역자였다. 이기풍은 초기에 11살 먹은 절름바리를 만났는데, 목포의 병원에 갔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기풍은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고, 이 아이는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KMF Nov. 1911). 이것은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12년의 선교보고에 의하면 “교인 중에 권능을 받아 병고치는 자 많고, 전도인이 전도함에 문이 크게 열렸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박용규, 162). 이기풍의 아내 윤함예는 이미 신유의 체험을 한 사람이었다.

이기풍은 영적 전쟁을 통해서 선교를 했다. 제주도는 미신이 많은 지역이었다. 특별히 뱀을 숭상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뱀을 “뒷집 하라방”이라고 불렀고, 뱀을 위해서 밥도 준비했다. 이기풍은 큰 몽둥이를 들고 뱀을 잡았다. 사람들은 놀랐지만 이기풍의 기도로 죽어가는 환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이기풍의 전도를 받아들였다. 이기풍은 기도로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이기풍의 제주도 선교는 여러 협력자들로 인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기풍은 사모와 함께 동역하였다. 윤함예는 숭의여학교에서 현대식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특별히 그는 숭의여학교에서 현대식 조산법을 배웠고, 그는 제주에서 조산으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윤함예의 옆에는 항상 조산을 위한 가방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산을 도와 줌으로서 제주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뿐만이 아니라 이기풍과 윤함예는 장례식도 열심히 도와주었다. 특별히 윤함예는 시체를 잘 화장하여 염을 하였고, 이것은 주변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기풍은 그 주변에 있는 토착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사역하였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기풍이 제주도에 오기 전에 이미 제주도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왔으며, 이들은 이기풍이 오자마자 이기풍과 함께 사역을 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박영호가 유배되어 왔고, 이어서 이승훈도 유배되어 왔다. 이들은 제주도민들에게 근대문명에 대해서 말했고, 제주도민들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근대문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기풍은 육지에서 선교를 위해서 건너 온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사역을 하였다. 먼저 평양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는 여전도사를 파송하여 주었고,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와서 이기풍을 도왔다. 특별히 윤명식 목사는 이기풍과 더불어서 함께 사역한 사람으로서 목포 양동교회 담임목사로서 1097년 대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목포의 부흥운동은 대단해서 교회를 새로 짓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따라서 이기풍과 윤명식의 지도아래 제주도는 1907년 대 부흥운동의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제주도의 선교는 남장로교회의 도움을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제주도 선교는 독로회 전도국이 담당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전라노회, 후에는 전북노회 및 전남노회가 담당하게 되었고, 1930년대에는 제주노회로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다. 그래서 남장로회 노회가 이곳에 성경학교, 간이 진료소 등을 설치하여 도움을 주었고, 이런 관계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제주 선교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제주 선교의 중심이 될 선교기지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천주교의 경우 처음부터 정주 외국인 선교사가 있어서 선교를 주도하였지만 개신교의 경우에는 한 번도 정주 선교사가 주재하지 않았다. 통상 선교기지는 미션 스테이션, 학교, 병원, 교회, 기독교사회단체로 구성되어 기독교문화를 형성한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이런 기독교의 거점이 없었다. 제주도민들은 여러 차례 이런 제안을 했지만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 신사참배와 이기풍의 순교

이기풍 목사는 제주선교 약 10년 후에 제주도에서 나와서 전남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다시 육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건강 때문이었다. 제주도의 삶이 힘들었고, 여기에 실음증까지 생겨서 한동안 쉬어야 했다. 특별히 3·1운동 기간에 그는 전혀 활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고,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다시 1927년 제주도에 가서 제주 선교를 위해서 일하였고, 1932년 다시 돌아와서 전남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이 당시부터 이기풍 목사는 어려운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하였고, 1934년에는 여수 남면 우학리의 조그만 교회를 담임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그는 도서 선교에 매진하였다. 원래 제주 선교를 하였던 그가 이제는 전남의 도서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 총회는 1940년 이기풍 목사의 어려운 노년생활을 돕기 위하여 그를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약간의 생활비를 보조하였다.

이기풍 목사의 초기 사역이 제주도 복음화로 빛을 냈다면 그의 말기 사역은 순교신앙으로 빛을 발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중심으로 도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한반도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내선일체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미 천주교와 감리교는 여기에 항복하였고, 장로교는 여기에 항의하다가 1938년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순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기풍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이기풍은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일찍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처음부터 우상숭배를 반대해 온 한국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다 이기풍은 제주도 선교와 도서 선교를 통해서 강력한 영적 전쟁을 치루었으며,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다고 본다. 아울러서 이기풍이 함께 사역했던 남장로회 선교부가 신사참배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는 것도 참고사항이 될 수 있다.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그의 딸의 교육에 대한 입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기풍은 막내 딸 이사례에게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말 것을 교육했으며, 이것으로 불온사상학생으로 낙인 찍혔다. 학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광주 수피아여고에 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폐교되었고, 결국 당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있던 부산 호주장로교회가 운영하는 일신여고에 진학하여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일신여고는 전국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역자 자녀들이 진학해 오는 유일한 학교였다. 하지만 결국 일신여학교도 폐교되고 말았다. 이기풍의 신사참배 반대는 단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교육의 문제였던 것이다.

1940년 순천노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지상천국을 주장했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필자는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미 신사참배는 대부분의 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이미 순천노회는 1938년 총회의 결의 이전에 신사참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천노회의 많은 목사들이 지상천국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일본의 국체를 모독했다. 그 결과 1940년 상당수의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었고, 따라서 노회도 열 수 없었고, 이어서 총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그리고 이미 그의 나이가 70을 훨씬 넘은 나이에 이기풍 목사도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우학리교회의 뒤에는 일본 신사가 있었고, 이곳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이기풍은 일제의 감시의 대상이었다. 이사례는 이기풍의 체포의 3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위해서 설명한 대로이다. 둘째는 미국 선교사의 스파이라는 것이다. 이기풍은 오래 동안 미국선교사와 함께 사역하였고, 그가 개척교회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선교부로부터 보조를 받았다. 일제는 이것을 문제삼았다. 1940년 미국선교사들이 철수하게 되자 순천노회는 총회에 헌의하여 원로목사로 예우하고, 지원을 호소했던 것 같다. 셋째, 묵시록 강해였다. 아마도 이기풍 목사는 다른 목사들과 함께 천년왕국설을 믿었고, 이것을 가르쳤다. 이사례 권사에 의하면 묵시록 강의는 이기풍의 전문이라고 했다(이사례, [이기풍 목사의 삶과 신앙], 105).

이기풍 목사는 연로한 가운데서 일제의 고문을 받았고, 그의 나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건강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일제는 이기풍 목사를 석방하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2년 6월 20일이었다.

이기풍 목사의 순교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는 평생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이것을 자녀교육에도 실천하였다. 둘째, 일제말 기독교인들은 친미주의자로 몰렸고, 이것이 일제의 기독교 박해의 주요원인이다. 셋째, 일제말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천년설을 믿었고, 이것은 현실적으로 일본의 지배와 대립이 되는 것이었다.

5. 이기풍의 생활과 오늘의 한국기독교

이기풍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 첫째, 교회의 공적 개념이다. 이기풍 목사는 안수를 받을 때부터 전도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왕국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고, 순회하면서 사역을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는 바로 이 점이 부족하다.

둘째, 이기풍 목사는 사모와 공동의 사역을 하였다. 윤함애 사모는 원래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천주교는 독신으로 사목을 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결혼을 해야만 목회를 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사역함으로서 시너지 효과가 나야 할 것이다. 이기풍 목사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셋째, 이기풍 목사는 신앙으로 자녀를 교육하였다. 이기풍은 위대한 신앙인이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신앙은 단지 그 자신의 신앙만이 아니라 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신앙으로 키우는 것을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이기풍은 영적인 전사였다. 그는 제주도와 전남의 섬 지방을 주 대상으로 해서 사역을 했다.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단지 도덕만 가지고는 안 된다. 사람들은 복음을 통한 능력을 원한다. 이기풍의 사역은 많은 경우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역동적인 삶을 다시 보고 배움으로서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 할 것이다.

박명수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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