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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가끔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사실 저도 피아노를 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이엘 70번인가를 치다가 포기했습니다.
아마 내 생각대로 늘지 않았고, 힘이 들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피아노, 누구나 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주님은 오겠다는 사람, 한 번도 마다하신 적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따르고 싶다면 머리 둘 곳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머리 둘 곳,
집착이 아닐까요?
나라고 하는 집착, 내 생각, 내 감정이라고 하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 집착은 주님의 길을 막는 큰 벽입니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지금, ‘예’라고 해야 할 것은 ‘예’라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착 때문에 ‘아니요’ 해야 할 것을 ‘예’라 하고,
‘예’라고 해야 할 것을 ‘아니요’ 라고 합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굴, 보금자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엔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묶어놓지도 않거니와
사랑하는 이에게 묶이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
이 자유로움이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최은식 신부  강동교회

<저작권자 ©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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