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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

타이타닉의 영화 속에 보는 4명의 연주가,
이성을 잃고 방황하는 승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탈출을 포기하고 연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긴박한 상황에서 퍼진 이 아름다운 선율...
놀랍게도 흥분했던 승객들은 침착함을 되찾습니다.

연주는 배가 침몰되기 전가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승객들은
여자와 어린이부터 질서정연하게 구명보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구명보트가 부족해 탈출을 포기한 승객들은
연주를 들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했습니다.

왜 기도하라, 그것도 골방에서 기도하라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침묵은 이런 무언의 연주입니다.

참된 소통은 말이 아니라 삶속에서 드러납니다.
때문에 기도의 본을 가르치시며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실 것이다”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침묵 속에 관상했나요?
그래서 하느님을 만났고, 기쁨을 맛보셨나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 되어갑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대놓고 관상할 수 없습니다.
관상했다고 느낄 뿐입니다.
관상의 진실과 거짓은 언제나 뒤태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침묵으로 하느님과 소통했나요?
그렇다면 그 관상으로 이웃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과 소통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나요?

참된 관상, 골방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난 골방에 있다고 하면서, 언제나 시장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 형제와의 소통으로 드러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타이타닉의 선율처럼
나를 내려놓고 타자를 볼 수 있을 때,
나에게 준 십자가를 질 수 있을 때 무언의 침묵으로도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최은식 신부  강동교회

<저작권자 ©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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