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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은혜 교수의 글에 대한 논찬(2005/11/04) 한목협 제488주년 종교개혁 기념포럼 논찬

1.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목회 현장에 있으면서 세계 교회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 그 신학적인 인식과 오늘날의 세계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온 개혁교회 전통이 오늘날 세계의 현실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좋은 공부가 되었다.

내게 맡겨진 논찬의 자리는 본격적인 아카데미즘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신학을 공부하고서 그 쪽으로 얼마간 학문적 작업도 했지만 지금 있는 자리가 현장 목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괜스레 아카데미즘의 현장에 가서 물을 흐려놓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발제자의 원고를 읽고서 논찬자로서 이런 부담이 없어졌다. 발제의 글이 본격적인 학술 논문이 아니라, 제24차 개혁교회연맹 총회의 '아크라 신앙고백'에 대하여 그 내용과 의의 그리고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를 다룬 글이어서다.

2.

발제자는 아크라 신앙고백이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에 대한 신앙고백적 반대임을 전한다. 인간의 삶뿐 아니라 동식물과 모든 존재를 포함한 오늘날 세계가 총체적인 위기 가운데 있음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도 그런 위기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데 그 위기의 중심은 우리 사회와 문화에 내재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태도"다. 경제 문제가 오늘날 세계 위기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발제자는 한국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교회론에서 말하는 '늘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와 연관된 신학적 언급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경제제일주의 속에서 교회 대형화를 추구하면서 세속의 경제 논리에 물들고 종속되어 상품화된 '현실의 한국 교회'에 대한 준열한 비판이다.

발제자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의 위기를 풀기 위한 기독교 작업은 크게 두 가지다. 정확한 진단과 실천적 응답이다. 아크라 신앙고백은 이런 두 가지 작업과 연관하여 오늘날의 기독교가 실천적으로 나가야 할 큰 틀을 제시하고 있다.

아크라 신앙고백은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를 명백하게 반기독교적이며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생각을 '신앙고백으로서' 그러니까 "고백적 언어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서로 갈등하는 두 상황과 입장에서 기독교가 언제나 어느 한 쪽 편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다양성 가운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식의 부족과 여러 상황에 대한 판단의 미비 그리고 각기 다른 전통과 관습과 사고 때문에 그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도 많다. 기독교 신앙은 될 수 있으면 양쪽을 다 감싸안는 화해자와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로 갈등하는 두 가지 입장과 상황 사이에서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단호하게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기독교는 기독교가 편들지 않은 반대쪽과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명백한 입장 정리를 하고 난 뒤에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 정리가 성서적인 것이라면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정한 입장을 고수하고 지켜가야 할 것이다.

어쨌든, 아크라 신앙고백은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신앙고백적 입장을 정리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의견 표명이나 학설의 발표와는 다르다. 신앙고백은 목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신앙적인 실천은 내가 믿는 내용을 목숨보다 중요한 핵심가치라고 여길 때 거기에서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전통에 있는 신앙고백의 모든 "교리적 주제"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삶에 연결시킨다면, 그러한 신앙고백은 교육, 정치, 경제, 문화 … 등 인간 삶의 전반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된다.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를 비성서적이라고 고백한다면 곧 뒤따르는 진지한 질문이 이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경제 문제가 인간 삶의 가장 기초적인 몇 가지 중 하나인데, 그러면 어떻게 경제 생활을 하면서 살 것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해야 한다.

발제자의 글을 읽으면서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과 거기에 연결된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가 가지는 심각한 문제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공감했다.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 안에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적인 세속주의 현상에도 같이 아픈 마음을 가졌다. 그러면서 '성서적인 경제 구조나 질서'에 대한 언급을 기다리며 글을 계속 읽었다. 목회자로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발제자는 "자본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여러 번에 걸쳐서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저항의 영성으로 다양한 대안들과 목회적 모델을 창조"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말한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발제문의 마지막 쪽에 가서야 대안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사항들'이 나온다. "다양한 작은 경제 공동체운동", "초대교회의 대안적 소비 공동체의 목회적 모델",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절약과 절제 운동", "희년법의 정신 찾아서 현실에 적합하게 실천하는 것", "한국 교회의 목회적 실천이 세계교회와의 연대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

발제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여러 표현들은 아쉽게도 한국 교회 현장에 있는 목회자로서 금방 손에 잡히는 것들은 아니다. 신학자들과 같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문제일 수는 있지만. 한국 교회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실천해야 할 대안으로서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으면 했다.

발제자의 글에서 '사회복지'라든가, '분배의 정의'라든가, '사회주의적 분배의 정의'라든가 하는 단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놀랍다.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명제는 필시 인간 역사에서 자본주의에 대척점에 선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생각을 금방 떠올리게 할 텐데, 그런데 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사항들로서, 토지공개념이라든지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한 개념이라든지 오늘날의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항들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좀 더 구체적인 대안들이 다루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떠오르는 질문은, 아크라 신앙고백의 내용이나 또는 그와 연관하여 제24차 세계 개혁교회 연맹 총회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에 대한 논의는 없었는지 하는 것이다.

발제문 전체에서 발제자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비성서적인 성격을 얼마나 강하게 비판하는지를 잘 느낄 수 있었다. 아크라 신앙고백의 한 가운데 우뚝 서서 그 신앙고백을 같이 고백하는 사람으로서 발제문을 쓴 터라, 아크라 신앙고백에 대하여 어느 정도 거리를 두지 못했음은 이런 열정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한국 교회를 "개혁교회 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 교회"라고 단정하여 표현한 것은 아크라 신앙고백의 내용과 의미를 거침없이 써내려간 발제문의 문체나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하지 않은 기본적인 입장으로 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실수라 하겠다.

오늘날 세계의 총체적 위기 가운데에서 '교회가 희망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교회가 "개혁의 대상"일 뿐 아니라 "개혁의 주체"가 돼야 하는 또 될 수 있는 까닭에 대한 깊은 신학적 논리와 현실적 작동 구조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발제자의 좋은 발제문에 계속 이어져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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