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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개혁신앙의 전통과 오늘의 고백신앙에 대한 논평(2009/06/16) 한목협 제11회 전국수련회 정책포럼

본 정책토론의 제목인 “개혁신앙의 전통과 오늘의 고백신앙”이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 가지 정도의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개혁신앙의 전통이 형성해 준 신앙고백서들(도르트신경,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의도에 맞추어 우리의 신앙과 삶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둘째, ‘고백신앙’을 칼 바르트의 ‘바르멘신앙선언’의 영향 하에 있었던 1930년대 독일 고백교회의 신앙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전통적 개혁신앙의 진수가 고백교회의 정신이라고 전제하고, 오늘날 고백신앙의 정신을 교회와 사회적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 내는가를 묻는 것일 수 있다. 셋째, 개혁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과거의 신앙고백서들이 현대 한국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는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오늘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논평자가 판단하기에 한목협에서 최초에 의도한 것은 첫 번째였으나, 이재천 목사는 두 번째로 이해하였고, 안인섭 교수는 세 번째에 가깝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선 이재천 목사의 발제 내용을 살펴보자. ‘고백신앙’을 1930년대 독일 고백교회와 그 주된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신학으로 이해한 그의 작업은 세 가지를 연결시켜야 하는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칼빈의) 개혁신앙과, 1930년대 고백신앙과, 그리고 한국의 신앙이 그것들이다. ‘고백신앙’의 렌즈로 본 ‘개혁신앙의 전통’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지를 논한 것이다. 즉 칼빈의 시대로 돌아가서 칼빈을 살피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논하기 보다는, 고백신앙적으로 해석된 칼빈을 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고백신앙’을 칼빈 속으로 읽어 들이고(read into), 그렇게 읽혀진 칼빈으로부터 다시 우리 시대에 맞는 ‘고백신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주 텍스트가 아니라 ‘고백신앙’의 한 예시(例示) 정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칼빈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칼빈을 왜곡할 위험을 안고 시작하게 된다. 필자는 이재천 목사의 글에서 이런 한계를 발견하였다. 물론 이런 특정한 안목을 가지고 칼빈을 볼 때 얻어지는 이점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재천 목사께서 인용문을 표기하지 않으셨기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논평자가 보기에 그는 ‘고백신앙’이 칼빈을 읽는 방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빌헬름 니이젤이나 에드워드 다우이가 제시하려 하였던 칼빈신학의 해석이다. 물론 전통적인 칼빈주의자들(청교도 개혁주의, 도르트신경 작성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 하이델베르크 카테키즘 작성자, 튜레틴,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미국의 찰스 하지, 워필드, 벌코프 등)이 이해한 칼빈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고백신앙’이 칼빈을 읽는 방식은, 칼빈을 교리를 세우려 하였던 신학자로 보는 대신, 이율배반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하며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pp.73~74). 신학은 항상 교회 공동체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p.77-78). 교권 중심의 교회체제를 거부하고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며, 거룩성과 같은 교회의 속성을 보이지 않는 교회에 돌리고(p.75), 제도로서의 교회가 “합의에 근거한 계약공동체”이며(p.83), 교회의 직제를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다(p.84). 과연 16세기의 상황에서 칼빈이 이런 사람이었는지, 그가 교리와 교회의 관계, 혹은 교회론에서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논란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이재천 목사는 ‘고백신앙’의 특성(본질에 대한 강조, 믿음과 삶의 일치, 일상생활의 중요성,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신앙 등)을 전제로 하고, 이에 부합되는 내용을 칼빈에서 찾아, 그것들이 오늘 우리 교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덧붙인다(IV장). 대체로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들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비판하고(p.80), 중세 이원론을 탈피하여 이 세상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며,(pp.80~81)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며, 성경을 깨닫기 위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증거는 성경에 의하여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p.82). 교회의 사명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때로 폭군에 대하여는 저항해야 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p.85~86).

논평자는 이재천 목사의 글을 읽으면서, ‘고백신앙’의 정신을 오늘날 한국에 되살리는 예로서, 두 가지 정도를 기대하였었다. 첫째, 과거 독일 고백교회가 그러하였듯이, 성서와 복음에 대한 강한 헌신에서 비롯된 현실의 날카로운 비판이다. 오늘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높아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항적 민족주의에서 패권적 국가주의에로의 진화, 자유시장경제가 극대화 되어 ‘기업사회’로 진입함, 테크놀로지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월드컵 국수주의, 교육지상주의 등등. 한국 사회와, 심지어 한국 교회가 하나님 대신에 섬기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성서와 복음신앙에 기초한 저항과 거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고백신앙’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화해’(reconciliation)에 대하여 좀 더 강조하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한국 사회는 이념적으로, 지역적으로, 세대 간에, 기독교신자와 안티기독교인 간에, 남녀 간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 보수와 진보 교회 간에, 불신과 반목이 만연해 있다. 화목케 하는 자의 직분을 맡은 교회가 우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총신대신대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안인섭 교수는 칼빈의 신학과 정신을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 적용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신앙고백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으나, 칼빈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를 논구하였는 점에서 세 번째의 해석에 가깝다는 말이다. 안인섭 교수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일치,’ ‘개혁,’ ‘사회를 향한 디아코니아’라는 주제에 대하여 칼빈이 생각했을 법한 것들을 찾아내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니까 칼빈이나 혹은 개혁주의가 이런 주제들에 독특하게 어떻게 접근하고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는 대단히 어렵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흠, 칼빈이라는 500년 전 사람도 이런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생각을 하긴 했었군!’ 하는 정도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III장에서 칼빈이 일치의 신학자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가 성찬론에서 보여준 유연성을 들고 있다. 루터주의자와 동역이 필요할 경우는 루터파와 조율하려 하였고, 1549년 쯔빙글리주의자와 루터파의 대화에서 실패했을 때는 쯔빙글리파에 우호적이었고, 다시 1560년대에는 멜랑흐톤에게 접근하였다. 그래서 그를 “위대한 대화의 신학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단만을 본다면 칼빈은 어떤 원칙이 없이 루터파와 쯔빙글리파 사이에서 대화와 일치를 시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칼빈의 성찬론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이들과 대화할 수 있었는지, 그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필요한 일치는 신학적 원칙이 없는 구호에 그치는 일치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치는 서로의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적을 위하여 그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또는 내용상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마치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넘어가려 해서도 안 된다.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의 생각하는 방식과 그 기초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이미 많은 일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IV장 ‘개혁’에서는 칼빈의 개혁을 예배 개혁과 설교의 개혁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필자가 이 두 가지의 개혁을 모든 다른 개혁의 핵심으로 보았다는 데 대하여는 논평자도 동의하지만, 필자는 왜 이 두 가지 개혁만을 다루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대신 이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특히 설교의 개혁에 대하여는 칼빈의 설교론에서 시작하여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잘 요약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예배와 설교에 대하여 설명은 해 주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자리가 ‘정책토론’의 장(場)이니만큼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으면 좋았을 뻔하였다. “본질적이고 복음적인 것과 문화적이고 적용의 다양성 속에서 포용할 수 있는 것의 경계선이 어디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있지만, 또한 칼빈의 ‘중도’(vis media)에 대한 소개는 있지만, 그것이 한국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설교와 관련된 수많은 논의와 신학에 대하여 칼빈이 어떤 지침을 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안인섭 교수는 교회의 디아코니아의 사명에 대하여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칼빈이 당시의 상황 속에서 ‘사회 복지’를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중(二重)의 집사직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하여 대사회적인 봉사가 칼빈의 교회 직분론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등을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사회봉사의 정신이 남한교회의 통일운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점까지 잘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450년을 격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회 시스템 속에서의 교회의 사회적인 봉사의 형태가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며, 이들을 뒷받침하는 신학이론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성경에 나타난 초대 예루살렘교회나 로마 교회의 집사직이 주로 개인적인 ‘자선’이었다면, 칼빈 시대에는 구빈원과 같은 기관을 중심으로 행해졌고, 오늘날은 좀 더 조직적인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용어의 변화도 추적해 가면서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본 논문에서는 ‘사회 봉사’(diakonia)라는 말과 ‘사회복지’(social welfare)라는 말을 혼용해서 쓰고 있다. 이 단어들이 나타난 사회적, 신학적 맥락이 있을 법한데 이 둘을 그렇게 혼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욱이 남북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노력을 디아코니아의 범주에 집어넣었는데, 이것이 어떤 근거에 의하여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상세한 논의가 필요한 듯하다.

장동민 교수  churchr@church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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