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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Missional Church란 무엇인가?(2009/06/15) 한목협 제11회 전국수련회 기조강연

션에까지 이르게 된 한 사람의 여정

나는 영국 리버풀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 나는 “조용한 소년”으로 통했다. 나는 작은 석탄불 곁에서 책에 책을 읽으면서 몇 시간씩 보내곤 했다. 그 책들은 위대한 탐험가들의 모험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고 그들이 어떻게 먼 곳으로까지 길을 열어놓았는가를 기록한 책들이었다. 나는 위험천만한, 그러나 가망성이 있는 모험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 모험들이 나의 상상을 가득 채웠다.

나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오게 됨에 따라서 내가 내 자신만의 모험에 착수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엠프리스 오브 프랑스(the Empress of France, 아마도 기선의 이름인 듯. 이 이름 자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을 가리킴)는 내가 알고 있었으며 내가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세계로부터 나를 휩쓸어 토론토의 미지의 교외 지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바다를 건너 오자, 규칙이 바뀌어 버렸다. 나의 생활은 갱단과 싸움, 그리고 어른들의 기성 권력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점철되었다. 캐나다에서 나는 주먹이 나의 신세계에서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게 배워야 했다.

십대 후반기에 나는 한 교회에서 이전에는 결코 만나보지 못했던 따스함과 보살핌을 제공하는 몇몇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일은 죄책감이나 죄 혹은 실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여러분이 도심의 하층민 가운데서 자란다면, 그러한 종교적인 언사들은 그저 지겹고 따분한 것이다. 우리가 주름잡고 다녔던 길거리는 온통 죄책과 죄와 실패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어떤 뉴스거리가 아니라 그저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 없이 여러분에게 자신을 주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그런 사람들을 경험한다는 것 그 자체는 얼떨떨하며 당혹스런 뉴스거리였다. 그리고 그 뉴스가 나를 정복해 버렸다.

동시에 나는 교회의 강단에서 나오는 형식적인 말들을 듣기 시작했다. 그 목사님은 죄책과 권력과 순응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나 그 사회적인 코드를 전혀 원치 않았다.

대학에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재능으로 주셨음을 발견했다. 나는 대학에서 많은 성장을 이루었으며, 평생에 학문을 추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학문 추구는 나의 길이 아니었다. 도서관의 지하에 앉았을 때 한순간 너무나도 분명하게 내가 교회로 부름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전통적으로 말해서 이 부르심은 내가 신학교로 가서 목회자로 섬길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부분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내 자신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사역과 리더십의 이미지들을 전달받았다. 나는 장래 목회자들의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생각들에 동참해줄 수 없는 것 같았다.

이십 대 후반에 나는 나의 첫 교회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8년 동안 이 사람들과 더불어서 교회는 성장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곳에서의 나의 섬김을 혼동과 위기의 상태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교회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사역은 내가 성경에서 발견하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와는 거의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의 모든 나의 세대에게 있어서 교회와 기독교의 담론은 다른 세계에 대한 그들의 꿈과 소망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정반대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교회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그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대해 전해주는 것 훨씬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내가 볼 때 복음은 “나의” 필요들을 채워주는 문제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거친 여행을 통해 내가 십대 시절에 받았던 그런 사랑을 똑같이 드러낼 필요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준 굉장한 모험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의문점들은 계속해서 쌓여 나갔지만, 함께 얘기를 나눌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나의 의문점들을 나누고 교회에 대한 나의 당혹감을 나누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너무 비판적이라고 여겼다. 혼자서 이러한 갈등과 혼란을 겪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나는 나의 일생을 다른 교회들로부터 수평 이동해 온 사람들로 가득 찬 성장하는 교회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더 나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거나 더 음악을 잘하기 때문에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 나는 떠날 수도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이러한 지울 수 없는 의문점들을 가지고 나는 다운타운 토론토에서 한 죽어가는 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북미주와 유럽을 방황하며 다녔다. 나는 레슬리 뉴비긴의 책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Foolishness to the Greeks)을 읽었다. 그 책은 뉴비긴이 인도에서 30여 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나서 고향 영국에 돌아와서 쓴 책이었다. 그런 다음 나는 스웨덴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것은 내가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서 파고들어갔던 모험에 못지 않은 경험이었다. 후에 나는 교회와 복음과 우리 문화에 관해서 크레이그 반 겔더(Craig Van Gelder)가 인도하는 한 워크숍에 참석하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우리 문화 가운데서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 모든 만남들은 새로운 여행을 출발하도록 만들었다. 그 여행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방식의 교회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missional church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가르치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missional church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본다. 다음에서 나는 missional church가 무슨 뜻이며 그런 교회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정리해 주고자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missional church는 그들 주변의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하나님과 동참하는 온갖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Missional Church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1998년 한 작은 네트워크가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Edited by Darrell L. Guder, Eerdmans)라는 책의 저술을 끝마쳤다. 우리는 3년 여에 걸쳐서 missional ecclesiology이라는 아이디어들을 중심으로 신학자들과 선교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을 만나 대화하였다. 우리는 모두 조심스러웠으며 우리의 확신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missional church에 대한 명확히 발전된 담론(narrative)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저 그러한 아이디어들과 확신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우리는 배우고 발견해 나가는 산고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우리의 작업은 레슬리 뉴비긴의 저술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들 각 사람은 뉴비긴과의 어떤 접촉이나 연결을 통해서 이 대화에 합류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뉴비긴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기가 대략 30년 전에 떠나왔던 기독교 문화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뉴비긴은 기독교 선교의 최대의 도전이 이제는 과거에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했었던 바로 그 나라들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구 전통에 의해 형성되었던 유럽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뉴비긴은 한 아시아 지도자에게서 기억에 남는 질문을 받았다. “서구 사회가 개종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를 대변했다. 서구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바로 그 자체의 재개종(re-conversion)이었던 것이다.

젊은 세대의 여러 선교학자들이 뉴비긴을 찾아가고 그를 초대하여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 유럽의 문제의식은 북미주에 자리잡게 되었다. 뉴비긴은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서구 사회에 대한 선교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가르쳤다. 2천년대가 끝날 무렵에 그의 저술과 대화들이 미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성격에 대해 유사한 질문을 끌어안고 고민하고 있었던 선교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상의 조건에서부터 작지만 성장하는 네트워크가 서로 좀더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해서 마침내 The Gospel in Our Culture Network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네트워크의 자문과 저술 프로젝트를 통해서, 북미 문화권 안에서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문제들을 알리기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이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서 Missional Church라는 말로 공유되고 있는 개념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Missional Church가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

Missional Church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을 당시 나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웨스트 밴쿠버에 있는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내가 한 팀의 저자들과 함께 발전시키고 있었던 아이디어들은 나의 상상력에 도전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도전은 리더십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missional church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면서 나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missional 공동체들의 포메이션(formation)에는 반대되는 여러 형태의 리더십을 실천해 보았다. missional의 여정은 험난한 것이었다. 해소될 필요가 있었던 내 안에 있는 리더십 패턴들과 이해들을 확인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목회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나는 missional church 카테고리에 적합하게 보이는 교회 운영의 뉘앙스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뉘앙스들은 형편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목회자들과 교단 지도자들과 신학교들은 나를 초청하여 missional church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부탁했다. 여러 컨퍼런스와 강의와 혹은 다른 지도자들과의 간단한 대화 가운데서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이 모든 리더 가운데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큰 변화였다. 나 한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교회에서 missional 생활 스타일로 삶을 구축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미리 가지고 있는 선입관들과 정의(definitions)를 해체시켜야 한다. 나와 여러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missional church에 대한 몇 가지 공통적인 오해는 다음과 같다. missional church는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Missional Church는
● 전도 프로그램이 아니다.
● 새로운 해외선교 방식이 아니다.
● 교회성장 방법이 아니다.
● 교회를 운영하는 “차세대” 방식이 아니다.
● 교회를 운영하는 포스트모던 방식이 아니다.
● 반(anti-) 전통적인 교회 형태가 아니다.

이런 오해들과 관련해서 내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missional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도 활동에 대한 강조에도 missional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단기 선교 여행을 하거나 노방전도를 하고나 홈리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도 missinal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러한 활동들은 다 좋은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missional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선교하고 구제하고 봉사했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missional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 말이 단순히 유행을 타는 새로운 형용사이거나 단어라고 단정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모든 일에다 대고 missional이라는 단어를 붙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들로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들에 대해서 전혀 도전도 없이 교회를 계속 해나가고 있다.

missional church는 구태의연한 옛날 아이디어들에다가 새로운 명칭을 붙인 것이 아니다. 기성 사고 방식의 깨진 액자에다가 새로 페인트칠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오해들의 예들은 단지 새로운 언어로 포장된 옛날 형태의 교회일 뿐이다. 내가 워크숍과 많은 교회 시스템과의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서 배운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missional church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틀 혹은 새로운 안경이라는 것이다. 사실 고백하지만, 이러한 틀들을 이해하고 그 틀에 바탕을 두고 자료들을 만들어내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일은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싸움이었다.

리더들이 그 틀을 발견하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리더들이 종종 교회를 바라보는 missional 방식을 자기들의 옛날 패턴으로 잘못 규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 틀을 발견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배우면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옛날의 틀에 안주할 수 없다. 내가 고백하지만, missional church 대화는 교회에 관한 나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과 나의 리더십과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나의 이해 몇 가지에 도전을 가했다.

평신도들은 missional이라는 말에 대해 가장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말을 목사들과 신학교 교수들이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발명해낸 불필요한 은어로 여긴다. 그들은 그 말을 전도나 선교를 말하는 멋진 표현 정도라고 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말의 뜻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고 가정하기보다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두 세 마디로 자기들이 필요한 만큼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의미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일 missional church라는 말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우리는 걸려 있는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과 정열을 바쳐야 한다. 간단한 몇 문장의 정의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Missional Church: 특성과 의미

만일 우리가 missional church에 대한 물 흐르듯 간단한 정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다지 많은 혼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 접근 방식을 시도했다. 구글에서 “missional church”를 입력시키면, 잘 포장된 소포처럼 깔끔하고 명확하게 제공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명제적인 진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이 정의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교회에 대한 기존의 패턴과 가정들을 깨뜨리고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 가지 정의를 주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나는 탐구해야 들어가야 할 몇 가지 주제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 주제들은 여러분의 상상력을 확장시켜주고 missional church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제공해 줄 것이다.

1. 선교지로서의 서구 사회

Missional church는 현재 서구 사회들 자체가 선교지라고 인식한다. 이 사실은 새로운 전도 전략과 전술 훨씬 이상의 것을 요청하고 있다. 현대의 전도는 사람들이 기독교 스토리가 자기들이 살아가고 있는 문화의 정상적이며 규제적인 부분이라고 받아들였던 때에 발전되어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 저러 형태로 기본적인 복음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전도는 일종의 변증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한 변증을 통해서 헌신을 압박했었다. 그러한 식의 변증적인 전도 방식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기본적인 기독교 스토리를 이해했던 세계에서 통했던 방식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2002년 영국의 한 주요 타블로이드 판 신문은 그 나라의 한 로마 가톨릭 주교와의 인터뷰를 전면에 실었다. 그 헤드라인은 “영국에서는 기독교가 거의 끝장났다!”였다. 서구 유럽 대부분에 대해서 똑같은 논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캐나다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세대들 대다수는 기독교적 담론(내러티브)에 대한 기억을 전혀 간직하고 있지 않다. 겨우 25년 전만 해도 상황이 이렇지는 않았었다. 변천은 신속하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중 문화의 영향력 아래서 변화의 부식력이 수십 년에 걸쳐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그러다가 갑자기 문화와 사회가 대지진처럼 진동하면서 변화하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미국도 더 이상 이러한 변화에서 멀지가 않다. 그 변화는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다. 교외 지역의 메가 처치들의 표면 배후에서는 현재의 모습대로의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기를 원하지 않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늘어나고 있다.

missional 언어는 현대 우리가 서구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도전과 마주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현재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바를 조금만 조정하거나 조금만 코스를 수정해서는 안될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우리는 지난 반 세기 동안에 걸쳐서 ‘와서 보라’는 식의 교회를 형성했던 틀과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만 한다. 교단들과 지역 교회들의 기본 입장은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 가운데 처해 있는 선교사들이라는 입장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 일은 단지 조금 조정하는 일 훨씬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일은 일종의 새로운 종류의 교회를 요청하고 있다.

2.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것이다

21세기에 라틴어로 된 어구를 사용하는 것은 의사소통하기에 적절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교의 하나님의 성격을 파악한다는 것은 missional 담론에 중심적인 주제를 포착하고 있다. 북미주를 포함해서, 만일 서구가 다시금 일종의 선교 현장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그곳에서 복음의 중심적인 내러티브가 상실되어 버렸고, 다른 가치들과 스토리들에 의해서 심하게 타협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이 선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신 그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그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전혀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분명한 선언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서구 사회에서 교회들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들을 어떻게 채워주며 만족시켜주는가로 그 초점을 바꾸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들의 사적인 필요들, 개인적인 요구들을 채워주기 위해 사용되는 영적인 음식점에 진열되어 있는 한 가지 선택으로 포장되어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천박하고 타협되었으며 재생산을 하지 못하는 무능한 기독교이다. 그 기독교가 복음을 잘못 제시하고 있다.

성경의 담론들은 세상 가운데서, 세상을 관통하면서, 세상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의의 초점은 하나님에 있지 그 반대가 아니다. 미시오 데이(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인 이해이지, 개인의 필요에 부응하는 일을 중심으로 한 이해가 아니다. 교회의 초점은 missional하며 또한 영광 돌리기 중심이다. 크레이그 반 겔더는 이 사실을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두 가지 질문을 사용한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이다. 이 질문은 우리의 이웃들과 학교들, 사업 등등에서 현재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를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요구한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만일 사람들이 기꺼이 듣고자 한다면 복음의 권능이 계시해주는 바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 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상상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missional church의 이 측면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마다, 평신도들과 목회자들 가운데서 다 대경실색을 하며 혼란스러워 했다. 그들은 대개 이렇게 반응했다. “만일 복음이 북미주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개인들의 개인주의적이며 개별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면, 도대체 복음의 성격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질문은 우리의 틀이 다시 한 번 기독교 스토리를 경청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바뀌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missional에 대한 논의는 이 사고 방식에 대해 도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missional 논의는 다음의 사실을 요청하고 있다.

a) 복음의 주제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으로의 초점의 이동
b) 기독교 생활을 앗아가 버린 타협의 깊이에 대한 인식
c) 그리고 이 도전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헌신

3. Missional Church는 교회가 대조적인 사회가 되는 일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공저한 책 Missional Church을 쓰면서, 우리는 북미주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일꾼으로서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프로포절(proposal)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논의는 두 가지 분야를 살펴보았다. a) 하나는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라는 영역이었으며, b)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의해서 계시된 세상 가운데의 하나님의 목적들에 대한 것이었다. 첫 번째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 문화가 광범위하게 불연속적인 변화를 대규모적으로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변화는 교회를 이전의 중심적인 위치에서부터 주변으로 급격히 몰아내고 있다. 이 사실은 기독교적인 삶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다원적인 문화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그리고 두 번째 영역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뚫고 들어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문화와 사회의 구체적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불려나온 공동체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이다. 그 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창조 세계를 초청하고 계신 곳에 대한 징표이며 증인이며 선취(미리 맛봄)으로서 공적으로 불러내심을 받은 모임이라는 뜻이다. 교회는 그 공동생활과 세상 가운데서의 증거를 통해 모든 창조 세계의 운명과 장래를 선포한다. 지역 교회들은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가 이르도록 초대하시는 곳의 구현체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교회가 더 이상 자신들과 자신들의 필요 및 욕구를 위해서 살지 않고 대조적인 사회로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되도록 요청하신다. 대조적인 사회(a contrast society)는 그들의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미래를 증시해 내는 사회를 말한다.

일종의 대조적인 사회로서 교회는 신앙 내용들과 실천들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다. 그러한 신앙 내용들과 실천들은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특정 문화와 사회로부터는 이끌어낼 수 없는 생활 방식으로 끊임없이 교회를 모으고 형성시켜 준다. 우리가 자리잡고 있는 문화,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문화는 지금 후기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으로 지칭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컨텍스트, 마당이다. 그 마당 가운데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스토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들을 뚜렷히 표명하는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용적이며 개방적인 사회 가운데서 살아가는 적절한 생계 수단, 작동 수단은 개인의 특정한 권리와 감정과 필요를 무시하거나 짓밟지 않는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필요중심(needs-centered), 구도자 중심의 교회 멘탈리티(mentality)의 광기의 일부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전통에 충실하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자기들이 선교적인 충실성에 핵심적인 요소들을 침해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현재 우리는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각 개인의 필요성을 너무나도 중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대조 사회로서 형성하고 만들어가고 창조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성경과 위대한 전통이 제공하고 있는 자원들을 상실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상의 특성의 종합

레슬리 뉴비긴은 복음 및 교회 그리고 그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문화 사이에 이루어지는 삼방향 대화(three-way conversation, 삼중적 대화)에 대해 말했다. 선교적인 만남(조우)은 하나님 백성,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그대로의 복음, 주변 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을 요구한다. 만일 복음이 세상에 계시되려면, 모든 장소, 모든 시점에서 이 삼방향의 삼중적 대화가 요구된다.

이 삼각구도는 missional church의 세 가지 특성들이 상호간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서, missional church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필요를 더 쉽게 채울 수 있도록 해주는 더 나은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missional church라는 것은 이 삼각구도의 꼭지점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적인 조우에는 교회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이 있다. 그 세 꼭지점들 사이의 진정한 조우(만남)가 있을 때에만 상호 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문화에 대해 혹은 심지어 복음의 본성에 대해 타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뉴비긴의 이 예를 채택하여 뉴비긴의 삼방향 대화 모델이 서구 세계의 현재의 교회 상황에 적용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 가지의 missional church의 특성들을 삽입시켜 보았다.

앞으로의 여정

리버풀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마젤란, 바스코 다 감마, 쿠크 선장과 같은 사람들의 탐험기를 읽고 있던 소년 시절 나는 내가 대서양을 건너 다른 대륙에서 살아가리라고는 결코 상상조차 못했었다. 또한 지난 이십 오년 동안 내가 나를 형성시켜 주었던 탐험과 발견의 모험 가운데 임하리라고는 결코 상상해 보지 못했었다. 몇 년 전 나는 마젤란의 새 전기를 집어 들어 읽어보았다. 내 마음에 확 들어온 생각은 이 missional 여정이 마젤란의 여행과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자기의 목적지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정보가 없이 출발했었다. 그는 대서양의 반대 편 어딘가를 생각했었고 아메리카가 그 유명한 스파이스 제도(Spice Islands, 향신료가 많다고 생각되었던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출발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지도는 형편없이 부적절했으며 잘못 그려져 있었다. 그가 항해했던 배들은 작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았었다. 마젤란 자신도 리더로서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다. 그런 상태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세계를 돌아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여행을 했다.

나의 탐험은 마젤란이 했던 그런 항해와는 결코 다르다. 그러나 missional church에 대한 탐험은 우리를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위대한 발견들 중 하나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이다. 그 길은 현재 지도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길들이다. 그 길은 교회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땅들은 하나님이 우리 시대 가운데서 그의 나라를 드러내주실 때에만 찾을 수 있는 땅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운행하시며 창조 세계를 구속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모험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도구가 필요하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대화 상대들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앨럴론(Allelon)이 교회가 되기 위해 추구하고 있는 바이다. 앨럴론은 상호간의 대화 상대를 제공해 주며,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여 주며, 그 모험을 계속해서 진행시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원들과 대화를 각자가 가져올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Dr. Alan J. Roxburgh  churchr@church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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