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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차] 이원규 교수의 발제에 대한 논찬(2010/02/25) 한목협 제16차 열린대화마당 논찬

기조발제자(이원규 교수)의 “한국교회, 새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는 이 시대의 한국교회를 향한 한 신학자요 목회자의 절규로 느껴집니다. 발제자는 이미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는 종교사회학자 중 한 분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러한 명성에 걸맞게 발제자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그 명암과 더불어 대안까지 나름대로 잘 설명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통계를 바탕으로 한 분석 자료는 그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뒷받침 해주었고, 수치 하나하나의 인용에서 발제자의 고뇌와 또 다른 희망을 찾으려는 열망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현장교회를 섬기는 우리 목회자들이 깊이 성찰하고 되새겨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훌륭한 발제였다고 여겨집니다. (주1. 발제문을 읽어가면서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진단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제2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 (문화적, 맘몬) 또 하나는 여로보암 2세 때에 경제적 부흥기에 바알 풍요 제의에 빠져 있던 때에 호세아서의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 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화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4:6-7))

특히 2009년을 기준으로 기독교로의 잠재적 개종 인구가 115만 명 정도인데, 그 수를 놓고 200개 교단 6만 교회가 서로 신도경쟁을 펼쳐야 하는 제로-섬 게임을 하게 된다는 사회학적 분석은 본 논찬자로 하여금 오늘의 처절한 목회 현실과 관련하여 많은 상념에 젖어들게 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본 주제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희망을 논하는 뒷부분이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원론적 거대담론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본 논찬자는 발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제기와 더불어 몇몇 구체적 현안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한국교회 희망의 불씨'에 대한 다른 관점:

발제자는 한국교회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아낼 수 있는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신앙의 역동성,” “감성문화,” 그리고 “개 교회에 대한 충성.” “적극적 사회봉사” 이것들은 물론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급성장시킨 토대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거의 성장 동력이 (적극적 사회봉사를 제외하고는 ) 오늘날에 와서는, 그리고 특히 미래에 있어서는 더더욱 ‘희망의 불씨’이자 동시에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과도한 신앙의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사회로부터 배타적 집단이라는 의구심을 낳고 있고, (일부 성령운동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감성에 호소하는 개신교 종교문화는 이미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복음의 본질에서 일탈한 것은 아닌지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 교회에 대한 충성’도 그것을 뒤집어 보면 개신교인들이 ‘보편적(Catholic)’ 교회론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개 교회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된 한 원인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흔히들 “우리 민족은 뜨겁다, 열정적이다, 기가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합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이런 민족성을 유교는 예(禮)로써 절제시켰고, 불교는 명상으로 마음을 평정시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교와 불교 같은 전통종교는 민족의 가슴을 절제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근대화,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이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 덕택에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성장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이 거의 다 타버리자 이제는 방향성을 잃어버렸고, 산발적으로 과거 회귀적 불붙이기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개신교는 우리 민족의 뜨거운 감성과 열정을 절제시켜 냉철한 종교성으로 승화시켜내지 못했습니다. 민족성의 반대적인 것을 훈련시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융의 논거를 빌리자면, 대극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감성과 역동성, 개 교회에 대한 충성심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으려는 것은 발제자께서 제기하신 ‘패러다임의 변화’와 모순되는 것으로 옛 패러다임의 답습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울러 목회자들로 하여금 같은 유혹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계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도자적 비움의 영성,’ ‘복음적 신앙 회복운동,’ ‘신앙과 생활의 통합적 영성’ 등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롭게 한국교회를 개혁하고 재편하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2. 교회 성장과 희망의 상관성 문제:

발제자는 ‘빨간 불이 켜진 한국교회’ 장에서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을 ‘번영의 복음(Gospel of prosperity)’이라는 사회학적 이론을 가지고 분석하고, 변화된 상황, 곧 더 이상 ‘번영의 복음’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서 개신교의 정체현상을 ‘빨간 불’로 표현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교회의 추락한 사회적 공신력의 문제를 또 다른 위기적 현상으로 거론하였습니다. 이어진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두운 몇 가지 이유’ 장에서는 인구의 감소, 사회경제적 수준 향상, 종교이동의 한계, 한국교회의 낮은 신뢰도 등을 제시하였다. 물론 교회성장의 정체 내지는 퇴보가 위기의식의 보편적 공감대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한국교회가 성장하면 희망이 있고, 성장을 못하면 희망이 없는 것인가요? 종교사회학자로서 발제자는 한국교회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싶습니다. 희망의 불씨를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씨’일 뿐 ‘희망이 있다’고 자신 있게 외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 논찬자도 발제자의 분석과 전망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한국교회의 희망을 성장의 관점에서 논한다면 저는 그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장 없이도 한국교회의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교초기 한국개신교는 미약한 교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희망이었듯이 말입니다.

또한 희망은 도대체 누구의 희망입니까? 교회 내부의 희망입니까, 아니면 백성들의 희망입니까? 교세와 교권에 기초한 교회 중심적 희망을 말하기에 앞서 민족과 역사 앞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 중심적 희망을 말하자면 그것은 결국 “성장 통계학” 이상의 담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전히 큰 교회는 ‘성장주의’의 올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고, 작은 교회는 ‘성장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본질보다는 교회의 존립 및 생존이 주된 관심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수단이 목적이 되는 모순을 낳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신도 수나 재정, 외형이 줄어든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복음의 지평에서 한국교회의 희망과 내일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희망을 논하는 기준은 성장이 아니라 복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복음의 진보, 교회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장이라는 울타리 속에 감추어졌던 여러 가지 한국교회의 병폐들도 차제에 그 울타리를 걷어냄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는 희망의 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성장대신에 무엇이 희망이 되는 것일까? 건강한 교회론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이러한 점을 우리의 담론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인문학 및 자연과학의 대화 문제:

하루가 다르게 변혁되어져 가는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집단이 바로 종교계라고 합니다. 요즈음 정부와 국민들 간에 소통의 문제가 화두가 되어오고 있습니다만, 교회 역시나 세상과의 소통에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정신분석학, 종교학, 철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및 자연과학과의 대화에서 우선 길을 찾아야 합니다. 본 논찬자의 견지로는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정신분석학과 자연과학과의 대화가 아주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으면 현재의 교회의 모습이 보다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앤 율라노프(Ann Ulanov)(주2. Ann Ulanov 박사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교수이며 동시에 뉴욕 융 인스티튜드(Jung Institute)의 교수이다. 율라노프는 그의 부인 Barry Ulanov(컬럼비아 대학교 Barnard College 교수) 와 함께 종교와 정신건강 부분의 전문지인 Religion & Health의 공동편집장이기도 하다.) 는 종교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성숙시켜야 하는데 종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집단으로 떨어지며, 그러한 종교는 강박종교, 혹은 광신적 종교로 전락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개인에 있어서도 정신적인 퇴행이 발생하면 그의 신앙도 강박적 신앙, 광신적 신앙의 형태로 변질되는 것을 경고합니다. 대상관계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보면,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모습에는 상당한 정신병리적 증상이 포착됩니다. 단순히 성직자들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성직 문화의 깊은 근저에는 ‘자기애적 병리(자기애적 분열성 성격),’ ‘편집적 병리(편집분열성 성격),’ ‘분열성적 병리(도피성 분열 성격),’ ‘거짓 자기 병리(거짓 자기분열성 성격)’ 등과 같은 병리구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유아기의 전능환상(도널드 위니캇)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전능환상 속에 있으니까 유아기의 과대적, 과시적 욕구에 갇혀 있고,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지도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리의 근저에는 취약한 자기 존재의 허기가 있습니다. 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병리적 지도력을 재생산 내고 있는 것이지요. 교권적이고 패쇄적인 지도력의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존재의 허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곧 일종의 병리현상입니다. 병리는 치료해야 합니다. 병리가 치료된 다음에야 비로소 건강한 담론도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치료되지 않는 병리는 결국 병리를 방어하는 거짓된 담론만을 생산해 낼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건강한 지도력을 세워나가려면 지도자들이 성직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건강한 정신,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건전한 지도력 양성을 위해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성직 문화 속에서 목회자가 어떻게 건강한 인격체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에 보다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연과학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21세기는 과학문화 시대입니다. 과학문화 시대에는 질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며, 소통의 문화가 다릅니다. 과학문화가 제기하는 질문에 교회는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단지 폐쇄적이고, 비지성적이며, 교리적인 답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철저히 과학문화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과의 대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리처드 도킨스의『만들어진 신』이 한국에서만 10만 권 이상 팔렸습니다. 반 기독교적인 강경한 과학도의 논리에 우리 교회의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신앙을 제대로 변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킨스의 논리는 다분히 논리적 비약과 허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도킨스의 동기도 이해가 됩니다. 그는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단절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이 책을 통해 표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을 이어받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다문화, 다종교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적 환경을 고려할 때 타 종교와의 대화 문제 역시 한국교회가 언제까지나 터부시 하며 피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다 진취적인 자세로 포용성을 가지고 타 종교와의 대화에 나선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하면서 복음의 진보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

교회는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의 자기 교회상이 정립되어 가야 합니다.(cf. 신10:8, 14:29, 사1:23, 렘22:3, 마11:19, 눅7:34)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세계개혁교회연맹에서는 아크라 신앙고백서를 통해 오늘의 세계 경제구조는 불평등한 가난의 재생산 구조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20대 80의 세계화 현실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함께 가난을 재생산하는 세계 경제구조에 대한 자기 목소리를 가짐으로써 교회는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 사랑 받고 존경 받는 교회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희망은 바로 그런 곳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5. 분단 극복의 과제:

한국교회는 분단극복의 민족사적 과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남북의 화해자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3.1운동 당시 민족사적 과제는 독립이었습니다. 오늘의 민족사적 과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분단극복과 통일입니다. 단순한 남북의 나눔운동 차원을 넘어서 한국교회가 이념과 체제의 차이로 갈라진 이 민족의 얼어붙은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일 수 있는 첨병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냉전적 사고가 이 민족을 볼모로 잡지 않도록 교회가 나서서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실천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6. 기독교 설교방송 및 매체 문제:

기독교 매체들의 설교방송에 대한 현실적 진단과 함께 정직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방송이면서도 동시에 상업성을 담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할지라도 기독교 방송매체에서 들려지는 설교는 너무나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설교방송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영성의 하향평준화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기독교 방송들이 다양한 교회의 형태와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공적 담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반 공영방송은 시민운동 기구들과 정부의 견제 속에 있습니다. 그에 반해 기독교 방송의 정화 기능은 매우 취약한 형편입니다. 한국교회의 새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 인터넷 방송을 포함한 기독교 방송 및 일반 매체들의 현주소를 공교회 차원에서 냉철히 검토함으로써 기독교 방송 및 매체들이 한국교회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우리의 갑옷을 벗고 첫 사랑의 장소인 광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불, 바람, 지진 소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왕상 19:12)이 들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희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4-15)

정병길 목사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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