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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한국교회, 하나님나라 iconic sign일 수 있는가?(2011/06/13) 한목협 제13회 전국수련회 기조강연

I. 서론

“The End of Christianity in the West”라는 작은 논문에서 Riley Case 박사는 오늘의 세계기독교가 가고 있는 비극적인 흐름 세 가지를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비극적 흐름을 뿌리까지 소멸(extinction)되어가고 있는 기독교라 했습니다. Australia, Austria를 시작으로 서구 일곱 나라 교회가 여기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비극적 흐름은 ‘소멸’은 아니지만 심각한 세속화 도상에 있는 기독교라 했습니다. 여기에는 England, France, Germany가 속합니다. 세 번째 흐름은 바로 지난주일(상징적인 시간), Kenya, South Africa, Tanzania, Uganda에서 예배드린 성공회교인들의 수가 영국, 캐나다, 미국에서 예배드린 성공회교인들을 합친 수보다 훨씬 많았으며, 중국에서 예배드린 기독교인 수가 유럽나라 기독교인 보다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미국기독교가 어디서 미래교회의 sign을 찾아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적어도 죽어가는 유럽 기독교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조심스레 Africa 교회와 Asia 교회를 미래교회의 sign으로 지목했습니다. 미래교회의 sign으로 부각된 한국교회! 과연 그런가? 목사님의 교단과 섬기는 교회! 21세기의 sign입니까? 이 질문 하나를 부둥켜안고 고통스런 순례를 함께 시작하고자 합니다.

II. 두 교회 이야기:

상징적 은유를 찾기 위해 저는 의도적으로 미국의 두 교회 이야기를 선택하였습니다.

1) Crystal Cathedral Church 이야기

그 하나는 California, Garden Grove에 위치한 Crystal Cathedral Church 이야기입니다. Student power, Women power, Hippie로 상징되는 문화혁명이 미국을 뿌리까지 흔들고 있던 1960년대, 그 한복판에 돌풍을 몰고 등장한 Crystal 교회! 분명 이 교회는 혁명적인 시대가 뿜어내는 세속적 언어 앞에 과감히 답하는 미래교회의 sign으로 부각되었습니다.

“통유리건축물”은 미래교회 건축의 예시가 되었으며, “탈예전적예배”는 Willow Creek의 seeker’s sensitive, 소위 ‘구도자예배’를 훨씬 앞질렀으며, “탈교단주의”는 세계로 확산되는 독립교회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50년 넘게 영광을 누리던 이 찬란한 교회가 2010년 10월 Chapter 11라는 기호로 연방정부에 파산 신고를 하고 지금 매각에 들어갔다는 후문입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파산으로 치닫고 있던 2009년부터 Schuller 목사 일가 8명이 이러저런 명목으로 해마다 180만 불을 인출해 갔다는데 있었습니다. 존재이유를 상실한 기독교왕국의 말로를 보는 듯하여 슬프기까지 합니다.

2) Church at Hill Brooks 교회 이야기

그러나 다른 교회이야기는 Alabama, Birmingham에 있는 Church at Hill Brooks 교회 이야기입니다. 2006년 당시 32살의 나이로 담임목사가 된 David Platt 목사가 쓴 고백서 “Radical”이 출판되면서 이 교회는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찬란한 megachurch의 신화를 써가던 어느 날, Platt 목사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아시아의 지하교회를 세 번 방문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비밀 공간! 거기에 모여든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온 생명을 걸고 있었습니다.

깊은 인상을 받고, 교회로 돌아와 강단에 서는 순간, 오페라 하우스 같은 교회당, 화려한 조명, 쾌적한 실내공기, 부티가 흐르는 교인들 얼굴을 보는 그 순간, Platt 목사는 그 속에 지하교회교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나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Platt 목사는 일대 신앙의 모험을 걸었습니다. wide screen 떼고, Air condition 끄고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100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성경말씀에 생명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임을 ‘지하교회’(Secret church)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구촌 선교에로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잃어버린 ‘존재이유’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Mission이 있는 megachurch! 미래교회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sign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 두 교회에 붙이는 논평 하나를 가하고자 합니다. Crystal Cathedral 교회의 문제는 처음부터 교회의 system 문제도, program의 문제도, Max Webber가 말하는 ‘카리스마의 일상화’도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처음부터 ‘종말론적 motif’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말론적 motif’가 없었다는 말은 하나님나라가 임재할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는 말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가 그 교회의 존재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하나님나라를 빙자한 기독교왕국의 전형이었습니다. 우리가 Church at Hill Brooks라는 무명의 교회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룩한 megachurch나, 실험에 들어간 ‘지하교회’나, 지구촌 선교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Platt 목사와 교인들은 ‘종말론적 motif’를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기고, 그들은 하나님나라 순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III. 한국교회 이야기:

영욕이 극렬하게 교차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 목사님과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한국교회, 그러나 뷸맨(W. Buhlmann)이 예언한 제3교회로 훌쩍 들어선 한국교회, 그런데 이 교회가 미래 sign이 되기도 전에 서구 기독교처럼 추락할지도 모르는 수많은 지표들이 한국교회의 뿌리를 흔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종교사회학적 관심으로 떠오른 한국교회의 50년을 네 개의 trend에서 그 의미를 먼저 보고자 합니다.

1) Church growth

첫번째 trend는 ‘교회성장’(church growth)이라는 종교사회학적 기호였습니다. ‘교회성장’이라는 기호는 미국교회가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20년 동안 만들어낸 기적신화에서 따온 서술이었습니다. 밖으로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안으로 터져 나온 신앙적인 에너지의 분출은 미국 개신교를 전인구대비 64%까지 끌어올리는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의 메시지는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이었다고 Carl Dudley는 해석합니다. 이때부터 사실상 ‘풍요의 신학’(theology of affluence)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미국교회는 ‘종말론적 motif’를 놓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성장은 1950년과 1960년의 초토화되었던 땅이 공장으로 바뀌면서 함께 부각한 ‘축복신학’과 맞물려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이때의 메시지는 ‘한국의 꿈’, Korean Dream이었으며, 이 꿈을 따라 사람들은 교회로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기적은 1970년에서 1990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한국교회도 ‘종말론적 motif’를 잃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여기서 우리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나 도피적 종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빙자한 기독교왕국을 우리 모두 꿈꾸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2) After church growth

두 번째 trend는 ‘교회성장이후기’(After church growth)라 부르는 새로운 기호의 등장입니다. 일명 ‘침체기’(stagnancy)라고도 부르는 이 기호는 무서운 시대적 독소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미국 발 저항문화’(student power, black power, hippie, yappie 등)는 ‘문화혁명’(기존질서의 붕괴 그리고 무질서 그 자체를 즐기는)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발맞추어 일어난 ‘세속신학운동’ ‘세속도시’의 출현은 정통신학의 근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보다는 ‘세속의 거룩성’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속신학은 젊은이들의 탈출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흐름 속의 ‘암호’를 읽지 못한 것입니다. 암호를 읽지 못하다 보니 그것을 ‘coding’ 기호화 할 수가 없었으며, 더욱이 그것을 교회와 목회 속에 ‘해독’ (decoding)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라고 질책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서 저는 뼈아픈 질문 하나를 우리자신에게 묻고자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리워 시대의 암호를 읽는 일도, 그것을 기호화하고 또 해독할 수 있는 소중한 과제를 막아 왔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성장신드롬’(church growth syndrom)이라는 ‘성장주의환상’이었습니다(Carl Dudley). 세속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성장신화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1990년에서 2000년 사이! 민주화와 GNP 1만 불 시대가 열리면서 교회 안에 둥지를 틀었던 정치-경제-사회 피난민들이 서서히 교회를 탈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1%씩의 교인들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새로운 도약을 모험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도약이 시대의 암호를 읽고, 그것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다시 교회와 목회 그리고 선교 속에 해독하는 진통의 과정을 생략한 채, 미국의 한 교회가 성공한 소위 구도자예배-seeker’s senstive라 부르는 ‘열린예배’를 검증도 비판도 없이 대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열린예배는 순식간에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고, 따라서 교회건축은 오페라하우스로 전형되는 새로운 건축문화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두 가지를 질문하고자 합니다. 문화선교의 신학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교회가 가고 있는 다양한 목회 program 그 뒤에는 ‘교회성장신드롬’이 control tower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피로 내지는 영적 탈진에 계속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3) Switch

바로 ‘교회성장’과 ‘교회성장이후’ 사이에서 우리 모두 머뭇거리는 그 틈새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세 번째 trend가 한국교회뿐 아니라 미국교회를 난타했습니다. 미국교회는 1970년에서 2010년 사이 40년 동안, 모든 교단마다 2000명 이상 되는 megachurch들이 계속 증가하는 동안 모든 교단의 80-90%의 교회들은 100명 이하로 추락하는 소위 ‘작은 교회’-small church complex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교회들은 해마다 3000개가 문을 닫습니다(Mark Chaves). 이 흐름은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미국종교사회학에서는 ‘switch’라고 합니다. 작은 교회 교인들이 경제적 부담을 피해, 그리고 집단흥분을 위해 큰 교회로 ‘바꿔치기’ 한다는 것입니다.

1990년에서 2010년, 20년 사이, 한국의 megachurch는 세계 50대 교회 중 5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로 ‘지성전전략’으로 알려진 흡수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새신자 영입보다는 작은 교회교인들의 ‘switch’로 megachurch들이 비대해지는 동안, 지역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려야 할 작은 교회들은 소위 ‘survival game’에 휘말리면서 작은 교회들은 계속 고사 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선한 싸움이 아니라 교인을 쟁탈해야 하는 무서운 종교 전쟁터로 빠져 들었습니다. 이 점에서 오늘 한국교회와 미국교회는 동시대적 상황으로까지 몰림을 받았으며, 우리에게 ‘way out’, 돌출구가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교회성장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학적 색맹이 되어 이 흐름의 비밀을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4) Spiritual, but not religious

피투성이가 된 틈새에 네 번째 trend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에 동시대적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교단들은 권력 잡기에 혈안이 되고, 크고 작은 교회의 사건들이 대중매체를 도배질하는 그 틈새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상 하나가 다가왔습니다.

이것을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고 부릅니다. 기성교회와 종교는 거부하고, 스스로 영적으로 살려고 교회를 종용히 떠나가는 젊은이와 지식인이 연간 2-3%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싸움은 megachurch와 작은 교회 사의의 싸움이 아닌 듯합니다. 미래의 싸움은 spiritual, but not religious를 내걸고 떠나는 세대와 교회가, 목사님들이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우리 같은 노인세대는 2-30년 뒤에는 사라질 것입니다. 거기에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세대마저 떠나고 난 한국교회! 그때 가서도 구미교회를 비웃을 것입니까? 미국교회는 2050년 개신교가 18%로, 한국교회는 지금의 추세로 라면 400만에서 500만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목사님, 목사님은 여기서 어디로 핸들을 꺾으시겠습니까?

IV. 한국교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한국교회의 미래는 spiritual but not religious를 중얼거리며 말없이 교회를 떠나거나, 떠나려고 준비하는 젊은이들, 지식인들과의 ‘선한 싸움’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spiritual을 찾고 있는 이들에게 사실상 그들이 싫어하는 religious를 가지고 계속 답하거나, 강요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CCM’일 수도 있고, ‘열린예배’일 수도 있으며, 이름도 생소한 ‘Cell’, ‘G12’, ‘Alpha’, ‘Tres Dias’, ‘두날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생을 질문하던 부자 젊은이가 ‘영생’이란 열 가지 계명 다 지키고 난 후 11번째 정도로 착각한 것과 같습니다.

Program은 공동체의 표현양식일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없는 program은 사람들을 교묘히 ‘객체화’ 하고, ‘비인격화’ 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 한국교회가 과용하고 있는 program들은 오히려 영적 피로감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program으로 spiritual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spiritual을 묻고 있는 지식인, 젊은이들에게 한국교회가 religious로 답하는 두 번째는 소위 ‘clerical paradigm’이라 부르는 성직자 패러다임입니다(James Hopewell). 오늘 기독교신문과 internet 매체를 덧칠하고 있는 그 많은 모임들, ‘선교대회’, ‘윤리회복’, ‘교회성장세미나’, ‘설교크리닉’은 소중한 개혁의 몸부림들이지만, 그 중심에 ‘성직자중심주의’라는 clerical paradigm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그곳에는 ‘congregational paradigm’라 부르는 회중성, 공동체성 더 나아가 Kingdom paradigm은 외면되거나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디에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공동체가 무엇이고, 그 안에서 목회가 어떻게 ‘종말론적’일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답하는 세미나나 모임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spiritual을 묻는 이들에게 한국교회는 그들이 싫어하는 religousity만을 가지고 답하려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빙자한 기독교왕국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그 속에서 왕 노릇 하려는 욕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그것은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 21)입니다.

저에게 이 말씀은 주님의 종말론적 요청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것저것 기웃거리지 말고 한 가지, 하나님나라만을 ‘존재이유’로 하는 혁명적인 전환을 모험하라는 분부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program이나, clerical paradigm 으로 허공을 치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생명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교회의 system, 교인 하나하나, 교회건물, 교회재정, 목회자의 영성과 전문성)을 Kingdom of God paradigm으로 과감히 전환해 보라는 명령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paradigm shift는 거창한 회개운동을 요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죽는다고 교회가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돌려드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때 기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전환하는 그 순간부터, 교회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것은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담아내는 ‘종말론적 통로’로, 하나님나라의 존재양식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함께 그토록 쉽게 깨져나간 제자공동체는 하나님나라를 빙자한 왕국을 꿈꾸었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삼키시고 다시 사신 부활계시에서 만난 주님! 주님 안에서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만나고, 기억하고, 대망하는 그 순간, 성령의 능력주심 안에서 제자와 120문도는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metanoia) 예루살렘교회는 출현하였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모인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때문에 교회는 처음부터 역사 - 종말론적 공동체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하나님나라를 유일한 존재이유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V. 하나님나라의 iconic sign으로서의 한국교회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전환한다는 metanoia는 교회의 모든 에너지와 구조(Leitourgia, Kerygma, Eucharist, Didache, Koinonia, Diakonia) 그리고 목회자의 leadership까지도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담아내는 iconic sign으로 전환하는 구조적 연계성을 동반합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종교시장(relgious market)에서 유일하게, 그러나 종용히 부흥하고 있는 교회는 놀랍게도 “Eastern Orthodox Church in America” - “미국동방교회”입니다. 오늘 저는 이교회가 표현해내는 종말론적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 교회 부흥 뒤에는 Alexander Schmemann이라는 대예배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소련을 탈출하여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한 Schmemann은 미국으로 건너온 후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교회론과 예배신학을 가지고 동방교회를 종말론적 공동체로 표현해내는 신학적인 작업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미국에서 자생한 이 동방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하나님백성의 신앙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교회에는 유행성 program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종말론적 통로로서의 ‘주일공동예배’에서 그들은 신앙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한 주일에 단 한번만 드리는 주일공동예배는 ‘주일신학’에 근거합니다.

주일, 주님의 날(Lord’s Day)은 제7일 또는 제8일이 아니라 죽음을 삼키시고 다시 사신 종말론적사건! 하나님의 생명이 온 우주를 지배하는 종말론적 시간이었습니다. 이 주님의 날,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여기서 예전과 예식은 하나님나라의 초청에 참여하는 하나님백성의 응답과 파송의 종말론적 통로입니다. 여기서 Schmemann은 예전의 신비화와 성직자의 예전화(clerical paradigm)를 강하게 경고합니다. 동방교회는 주님의 날의 주일공동예배 이외에는 예배가 없습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은 세속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하심과 재림의 약속 안에 있는 종말론적 시간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순례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세계에서 증언자로 살아야하는 종말론적 시간입니다.

화요일 저녁,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이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순례하는 성경공부(Didache)에 참여합니다. 이들은 성인은 예배만(그것도 많은 경우 10회), 어린이는 교육(주로 교회학교)으로 이원화해온 한국교회의 구조적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목요일 저녁, 모든 동방교회의 하나님백성은 ‘성례전적 교제’(sacramental koinonia)를 나누는 가정교회모임에 참여합니다. 성례전적 교제! 떡을 떼고, 성경을 묵상하고, 중보기도를 나누며, 이웃의 아픔을 품는 이 가정교회 모임은 교회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그 나라와 지역을 이어가는 가교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월요일에서 토요일 사이, 종말론적인 시간, 그들은 ‘직업’을 소명의 자리로, ‘기업’을 기업윤리와 선교의 자리로 하여 그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풍요 속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살아가는 순례공동체를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교회의 한 모습인 듯합니다.

이 작은 미국의 교회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담아내는 iconic sign이었습니다. 우리처럼 요란하지 않지만, 그들은 종용히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감동하며, 이 땅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담아내는 종말론적공동체를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Iconic Sign!

VI. 결론: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미래교회 목회의 전략적 지표

미국종교 경쟁시장에서 매해 3000교회가 문을 닫는 치열한 ‘survival game’(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사회학자, Nancy Ammermann, Mark Chaves은 살아남는 교회들이 가지는 공통점 세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1) Core members

그 첫째는 살아남은 교회에는 반드시 그 안에 ‘core members’(핵심멤버들)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는 왔다가 가지만 core members들이 교회를 끝까지 지키는 교회는 살았습니다.

한국교회 미래목회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실마리를 찾습니다. 미래 목회자는 신자 하나하나를 내 목회의 대상, 내지는 내 교인으로 취급해오든 clerical paradigm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백성, Laos Tou Thou로 세우는 목회 - Kingdom paradigm으로 전환해야 하는 sign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2050년 설사 한국교회가 400-500만 명으로 축소되는 불운이 온다 해도, 중요한 것은 그 400-500만 명이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현존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적 소수(토인비)가 되어 역사를 변혁해가는 남은 자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지금 어떤 목회를 하고 있습니까?

2) Priestly listening

살아남은 작은 교회들의 공통점 두 번째는 그 교회가 처해있는 그 지역의 아픔을 읽고, 교회가 그 아픔과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가? 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교회는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을 신학적 질문이라 했습니다.

지역의 아픔을 읽고, 교회의 존재이유를 질문하는 신학적 질문! 이것은 지금 갈림길에 서있는 한국의 작은 교회들, 개척 교회들, 농촌교회들이 씨름해야 할 목회적 과제입니다. Program으로부터 교회가 처해있는 지역사회 역사에로 목회의 눈을 돌려 보십시요. 그리고 지역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아픔들을 읽어내는 신앙의 눈을 가져 보십시다. 그리고 이 지역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경청하십시다(priestly listening - 제사장적 경청). 그 지역의 언어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언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사님이 왜 그곳에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순간, 목사님과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존재이유로 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로 metanoia 될 것입니다.

3) Minimal operation

살아남은 작은 교회들의 공통점 세 번째는 ‘minimal operation’(최소한의 운영) 방법이었습니다. 대출한 돈으로 교회당 리모델링한 교회는 빚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운영비로, 그러나 소박하지만, 예배, 성경공부, 가정교회, 섬김으로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표현하는 iconic sign으로 승부를 건 교회들! 색깔 있는 교회는 생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촌에 남겨두신 남은 자, 제3교회, 하나님나라 그루터기임에 틀림없습니다. 1000만 명의 하나님나라 백성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순순한 신앙의 열정을 뿜어내는 그리스도인들, 무엇보다도 ‘고난의 영성’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겨두신 남은 자들입니다.

문제는 우리 목회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빙자한 기독교왕국을 꿈꾸는 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죄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미래! 그것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우리의 삶, 교회, 목회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받아드리는 metanoia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께서 목사님 한분 한분을 품어주시기 기원합니다.

은준관 총장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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