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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참된 일치를 향하여(2012/06/18) 한목협 제14회 전국수련회 기도회 설교

빌립보서 2장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야고보서 4장 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이 시대는 탐욕과 욕망의 시대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경쟁을 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자본과 권력과 같은 힘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힘과 권력을 추구합니다. 정치, 사회, 경제적인 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 종교집단에서조차도 힘과 권력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고 이해당사자끼리 온갖 속임수와 뇌물과 심지어 폭력조차도 불사하는 극한적인 경쟁을 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사회적인 제도나 관습에 의해서 어느 정도 통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 역할과 기능이 작동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의 공동체성은 무너지고 양극화 되어 사회의 구성원들이 분열과 갈등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과 성공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인간들은 자연환경조차도 자신의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대상화하여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F)은 지난 3년 동안 300명의 연구진이 참여해 만든 보고서에서 “인구증가와 지속불가능한 경제성장으로 지구 생태계가 재앙과도 같은 변화를 갑작스레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이 사회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세속적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교회 구성원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분열하면서 이 시대의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교회의 분열과는 또 다른 하나의 사회병리현상으로서 교회의 갈등과 분열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불교 조계종 소속 스님들의 도박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불러 일으켰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 정통적인 종교집단의 지도자들조차도 이 시대의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을 보여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지도자는 어떨까요?

자본의 힘과 권력을 추구하며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분열하는 이 시대의 흐름과 우리 기독교는 무관한 것인가요? 우리는 이러한 시대의 가치를 극복하고 정의와 사랑과 일치와 같은 복음의 가치를 따르고 있는 것인가요? 분명한 것은 교회도 이 사회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흐름과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과도한 욕망을 추구하며 경쟁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첫 번째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자본과 권력과 같은 힘을 숭상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성공과 승리가 그 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고 믿음도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회가 점점 폭력화 될 것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사회에서 인간의 성정은 더욱 거칠어지고 폭력적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은 단순히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전체의 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을 그 목적으로 보지 않고 효용성의 가치로 판단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그 효용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가치에 함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모든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오직 인간의 탐욕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만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믿음의 가치도 여기에 종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회구성원은 서로가 경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 파당이 생기고 모든 집단은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시대의 가치를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서 내전에 빠진 로마를 통일하고 탁월한 행정력과 지도력으로 로마의 번영을 가져온 유명한 황제입니다. 원래 로마는 여러 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두 사람의 집정관이 1년씩 돌아가며 나라를 다스렸던 공화정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집정관 사이에 세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나라가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리고 이 내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한 사람이 바로 옥타비아누스 집정관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로마를 1인 체재로 다스리면서 로마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20년에 걸친 로마의 내란에 종지부를 찍고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평화를 가져온 옥타비아누스 장군은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고 마침내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신적인 존재’란 뜻입니다. 그는 또한 희랍어로 ‘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예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란 뜻입니다. 이때부터 황제에 대한 신격화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5장 25~26절에 보면 유대총독 베스도가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살피건데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때 황제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세바스톤’ 즉 아구스도에 해당하는 희랍어이며 이 말은 제가 언급한 것처럼 ‘예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6절에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사용한 황제라는 말의 원어는 ‘주님’(to kyrio)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사람들은 아구스도 황제를 구세주로 호칭했습니다. 어떤 시인은 악티움해전에서의 승리로 나라를 내전에서 구한 야구스도 황제를 칭송하면서 ‘오, 세상의 구세주. 아구스도여...’라는 헌시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분이며 그의 탄생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며 그는 아폴로신의 아들로서 신의 아들이며 온 세상을 전쟁에서 구원한 구세주로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황제 아구스도에 바쳐진 온갖 칭호들은 이제 예수님에게 그대로 바쳐집니다. 당시 황제가 신격화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던 세상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시며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라고 믿고 고백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아구스도 황제는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성공한 옥타비아누스 같은 사람, 힘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황제와 같은 사람은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당시의 지배체제를 뒤엎는 위험한 짓이고 당시의 상식적인 가치를 거슬러 대항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가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힘과 권력을 숭상하고 그 힘을 쟁취한 자가 승리자가 되는 세상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담대한 신앙입니다.

당시의 세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고백할 수 없는 신앙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는 전쟁과 살육으로 승리자가 되어 힘과 권력으로 나라에 평화를 가져 왔던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경쟁과 싸움으로 승리자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가져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로마의 황제가 주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신앙은 오직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우리를 하나로 연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힘이시라는 신앙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효용의 가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효용 가치에 따라 판단합니다. 모든 것을 나에게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경우 그 자식이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로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경우에 그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정성과 사랑은 그 효용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식의 연약함에 같이 동참하고 같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식조차도 그 효용 가치에 따라 자식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공부를 잘 해야 하고 돈을 잘 벌어야 하고 성공을 해야 그 자식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뿐 아니라 복음의 가치와는 정 반대되는 가치기준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 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세속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으로 인한 승리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며 너도 나도 경쟁을 통한 성공을 지향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그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여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비정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회는 병들고 극과 극으로 분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러한 사회 속에서 분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에 대해서 복음의 가치로 저항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가치를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경쟁과 성공의 가치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 없이는 여전히 교회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같이 경쟁하고 싸우고 성공을 탐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당파를 짓고 분열하는 구태를 탈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래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길을 따를 수 없다면 그래서 현대판 황제 숭배에 빠져든다면 세상과 똑같이 경쟁하고 싸우고 그리고 마침내 분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비로소 같은 길을 걸으며 교회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이 세속의 도도한 흐름을 거슬러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세속의 가치에 물들어 았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교회가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한목협이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들끼리의 연합이나 일치를 넘어서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온 인류가 하나로 일치하는 위대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 꿈을 이루는 길은 이 탐욕과 욕망의 시대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꿈이자 하나님의 꿈일 것입니다.

박경조 주교  churchr@church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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